2014년 4월 7일 월요일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허기와 절망. 그런 감정들은 행복의 변방에서 서로를 알아본 순간 경계를 넘어 조용히 연대한다.
매순간 예상치 않았던 낯선 곳에 당도하는 것이 삶이고, 그곳이 어디든 뿌리를 내려야만 닥쳐오는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어. 그리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꿈만이 가까스로 그 뿌리를 지탱해준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건 아닐 테지.
마리는 늘 낯선 시간을 원했고 낯선 곳으로 데려다주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런데 진정 낯선 곳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제 마리에게 남은 낯선 곳은 뒷걸음 질쳐서 발에 닿는 어떤 시간의 시원에 있는 것일까.
안나가 요한에 대해 아는 것은 그게 다였다. 안나가 요한에 대해 알고 싶은 건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 남쪽 도시에 가본 적이 있는지 언제나 조금씩 변하고 있는 네 계절의 바다를 좋아하는지 김종삼이란 시인을 아는지 진지하거나 소심하거나 낯을 가리는 성격 때문에 고민해본 적이 있는지 봄과 여름이 되면 어떤 색깔의 옷을 입을 것인지 어릴 때 털모자에 목도리를 두르고 부츠를 신는 북유럽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얼어붙은 운하를 따라 먼 세상으로 나가는 동화를 읽은 적이 있는지 해질녘 골목에서 울리는 자전거 경적 소리와 엄마의 심부름으로 두부를 사러 가는 비 오는 저녁의 냄새를 좋아하는지 따뜻한 코코아와 틀에서 막 꺼낸 국화빵을 좋아하는지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을 창가에 서서 소리내어 읽어본 적이 있는지 화창한 봄날 목욕을 갔다 겨우내 입었던 내복을 벗어버리고 돌아오면서 키가 조금 컸다고 느낀 적이 있는지 늦가을 소풍에서 돌아온 날 혼자 집을 보다가 불현듯 아주 늙은 뒤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슬퍼진 적이 있는지, 그리고 요즈음의 꿈들,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적으려는데 볼펜이 안 나오고 건너편에서 그 사람이 탄 버스가 떠나려고 하는데 인파에 떠밀려 다가갈 수 없고 드디어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나갈 준비를 하는데 수돗물이 끊겨 세수를 할 수가 없고 또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웃음이 멈춰지지가 않아 겁에 잔뜩 질린 채로 미친 듯이 웃어대는 길고긴 꿈을 꾼 적이 있는지, 키가 작고 마른 여자애를 좋아한 적이 있는지 어제 입었던 블라우스와 오늘 입은 조끼 중에 어떤 게 더 어울리는지 말해줄 수 있는지 루시아의 말대로 커트머리에 핀을 꽂으면 촌스러운지 크리스마스 선물로 장갑과 하모니카 중에 무엇을 받기를 원하는지, 그리고 크리스마스에는 뭘 할건지.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물어볼 수는 없었다. 요한은 루시아의 남자친구였다. 하느님이 잘못 포장한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 은희경
201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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